처방을 다시 씁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져라"라는 처방을 저는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다른 처방을 하려 합니다.
성인이라면 마인드셋을 직접 바꾸려 들기보다, 환경을 바꾸는 일에 자신의 노력을 모으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이 글은 왜 이런 정정이 필요한지, 그리고 개인의 입장에서 “환경 바꾸기"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룹니다. AI가 어제까지의 전문성을 오늘 모호하게 만드는 지금, 자기계발 담론이 매끄럽게 넘어가던 한 빈칸을 정확히 짚어보려고 합니다.
VUCA가 우리에게 청구한 비용
저는 VUCA1라는 어휘를 처음 만났을 때 그저 새 약어 하나로만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네 글자,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영어 원어 Volatility, Uncertainty, Complexity, Ambiguity의 머리글자)이 우리가 함께 청구받은 비용의 목록처럼 보입니다. 미군 전략학교에서 시작된 이 어휘가 비즈니스 맥락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되었고, AI가 본격적으로 일터에 들어오면서 그 네 글자는 한층 무거워졌습니다. 도구의 반감기가 짧아지고, 어제까지의 전문성이 오늘 모호해집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는 자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흔한 답은 평생 학습 능력입니다. 한 번 익힌 것을 오래 우려먹을 수 없는 시대이니, 끝없이 실험하고 실패에 대응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그 명제 자체에 저는 동의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그 다음 문장입니다.
“그러니 성장 마인드셋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 성장 마인드셋은 캐럴 드웩이 소개한 개념입니다. 능력은 노력과 학습으로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하고, 그 반대편에 능력은 타고난 양이 정해져 있다는 믿음인 고정 마인드셋을 둡니다. 두 믿음 중 어느 쪽을 갖느냐에 따라 같은 실패가 학습의 단서가 되기도 하고 자기 한계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개념의 골자입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란 처방은 평생 학습 능력을 개인이 의지로 조립할 수 있는 변수로 다룹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가능한 일일까요?
학습 의욕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국 TEDS 쌍둥이 코호트 5천여 명을 7세부터 16세까지 추적한 Zhou et al. (2026)2이 이 문제에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자세한 정리는 별도 다이제스트로 두었고, 한 줄로 옮기겠습니다.
타고난 학습 성향이 학업 성취로 이어지는 통로의 큰 부분이 학생의 학업 흥미와 자기개념, 호기심을 경유한다. 같은 가정에서 자란 형제 사이의 차이만으로 좁혀도 이 매개 효과의 83%가 살아남는다.
부모와 집, 학교를 공유하는 형제 사이에서 발생하는 학업 차이를 보았을 때, 그 차이를 만드는 요인 대부분이 학생 본인 안에 자리잡힌 흥미와 자기개념, 호기심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질은 학자들이 성장 마인드셋이 자리 잡는 토양이라 부른 변수와 겹칩니다. 성장 마인드셋 자체는 능력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이고, 그 믿음이 자라려면 흥미와 자기개념의 토양이 먼저 깔려야 합니다. 같은 부모와 집, 학교에서도 형제마다 다르다는 결과는, 그 토양의 차이가 환경의 평균이 아니라 아이 본인이 타고난 무늬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달심리학에는 이를 설명하는 모델이 있습니다. 능동적이고 유발적인 유전과 환경의 상관이라는 가설로, 어렵게 들리지만 한 줄로 풀면 아이가 자기 기질에 맞는 환경과 경험을 능동적으로 골라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호기심 있는 아이가 책장 앞에 더 오래 앉고, 그 시간이 다시 그 아이의 토양을 두텁게 합니다. 같은 환경에 놓인 형제 내 차이에서도 타고난 성향이 살아남는다는 발견이 이 모델을 통계적으로 받쳐줍니다.
그렇다면 학습 의욕은 기질이 밖으로 드러난 한 형태입니다.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의지가 자라기도 전에 작동하는 변수입니다.
그 의욕은 환경 안에서만 자란다
Hogarth et al. (2015)3은 학습 의욕의 옆자리를 채워줍니다. *친절한 학습 환경(kind learning environment)*과 *사악한 환경(wicked learning environment)*의 구분입니다. 자세한 정리는 이쪽 다이제스트에 두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가지 축만 빌려옵니다. 학습할 때 본 표본이 평가받을 때 만나는 세계와 얼마나 닮았는가입니다. 두 세계가 잘 겹치면 친절, 어긋나면 사악입니다. 단순한 어느 영역이 어느 쪽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분간하고 어디서 어긋나는가까지가 다음 표의 몫입니다.
| 축 | 친절한 환경 | 사악한 환경 |
|---|---|---|
| 피드백의 시간성 | 행동과 결과가 즉시 짝지어짐 | 결과가 멀리서 도착하고, 그사이 다른 변수가 끼어듦 |
| 어긋남의 원인 | 무작위 잡음(시도가 쌓이면 평균이 드러남) | 체계적 편향(샘플이 평가 세계와 구조적으로 다름) |
| 분간하는 단서 | 같은 입력이 비슷한 출력을 부른다 | 잘하는 사람의 비결이 매번 다르게 들린다 |
| 흔한 함정 | 표본이 충분하지 않은 채 직관을 굳혀 버린다 | 끈기로 버티면 답이 나오리라 착각한다 |
학습 의욕이라는 자질의 새싹이 친절한 환경에 떨어지면 자라고, 사악한 환경에 떨어지면 죽습니다. 같은 아이가 어떤 영역에서는 호기심을 키우고 어떤 영역에서는 흥미를 잃는 이유가 환경의 피드백 구조에 있다는 뜻이지요.
이 둘을 한자리에 두면 한 장면이 완성됩니다. 같은 집의 두 형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명은 책장 앞에 더 오래 앉고, 그 시간이 책 한 권의 즉각적인 깨달음을 가져옵니다. 친절한 작은 환경입니다. 다른 한 명은 같은 책장을 지나쳐 운동장으로 가고, 그곳에서 몸이 바로 응답하는 신호를 받습니다. 또 다른 친절한 환경입니다.
두 아이의 기질이 처음에는 미세하게만 달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자 다른 친절 환경을 능동적으로 골라낸 결과가 누적되면서, 한 명은 활자에 강한 아이, 다른 한 명은 몸에 강한 아이가 됩니다. 그 둘이 어른이 되었을 때 갖는 “마인드셋"은 수년 동안 다듬어진 무늬이지 어느 한 시점의 결심이 아닙니다.
성장 마인드셋이라는 이름의 변수는 그래서 마음을 먹은 다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긴 다음에 마음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질과 환경이 서로를 부르며 한 방향의 나선을 그리는 동안, 어느 시점부터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감각이 굳어집니다. 거꾸로 사악한 영역에서는 같은 움직임이 반대 방향으로 깎이면서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감각이 굳어지지요. 두 감각이 다 합리적인 학습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비관주의가 옳을 때
한 1970년대 후반 연구에서 우울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 가설이 제안된 적이 있습니다4. 우울한 사람이 자기 통제력을 더 정확하게 추정한다는 발견이었지요. 비우울 집단은 과대 추정하고, 우울 집단은 정확히 본다는 결과였습니다. 즉 낙관과 내적 통제 소재(internal locus of control)5는 현실 직시가 아니라 적응적 환상이라는 뜻입니다. 그 환상이 동기와 끈기를 만들어 결과를 자기실현 예언으로 끌어옵니다. 그래서 진화적으로 보존되어 온 것이지요.
Seligman6의 학습된 무기력 실험은 더 직접적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부정적 결과를 반복해 경험한 동물은 탈출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부분은 그 무기력이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정확한 통계적 추론이라는 점입니다. 인지 왜곡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정직한 모델링입니다.
100번 시도해서 모두 실패한 사람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은 통계적으로 옳은 결론입니다. 그 사람의 외적 통제 소재는 인지 왜곡이 아니라 학습된 진실입니다. 다만 그 진실은 현재 환경 안에서만 참입니다. 이 단서가 운명론과 처방을 가르는 경첩이 됩니다.
여기서 “성장 마인드셋을 가져라"라는 처방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란 처방은, 환경이 보상으로 응답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따르라고 똑같이 처방하는 것입니다.
같은 처방을 사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에게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마인드셋을 바꿔본다, 환경이 응답하지 않는다, “내가 마인드셋이 부족해서"라는 추가의 자책이 쌓인다, 외적 통제 소재가 더 굳어진다. 심리학적 처방이 오히려 무기력을 강화하는 회로에 빠집니다.
어떤 처방이 그 처방이 통하는 환경의 사람에게만 약이라면, 그것을 모두에게 던지는 일은 운의 영향을 망각한 채 의지만 질책하는 일이 됩니다. 자기계발 책의 매끈한 메시지는 종종 이 결의 산물입니다.
캐럴 드웩 본인의 정정
외부의 비판자들만이 이 빈틈을 짚은 것은 아닙니다. 성장 마인드셋 개념을 제창한 캐럴 드웩 본인의 입장도 최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Yeager와 Dweck(2020)7이 American Psychologist에 발표한 종합 논문에서 마인드셋 개입의 효과는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결과를 정리했습니다. 잘 짜인 학교 환경에서는 효과가 분명하되, 학생들이 노력의 보상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효과가 거의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마인드셋 변수는 환경 안의 변수이지 환경과 독립된 변수가 아니라는 점을, 학계도 인정한 셈입니다.
마음 대신 자리에 손대다
그렇다면 모든 건 타고나는 기질이고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단 걸까요. 운명론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된 시점에서, 환경 선택의 기회 창이 약간 열린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학교, 도시가 아이를 정의하던 시기를 지나면,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환경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 기회가 무한히 열리지는 않고, 그 기회를 잡는 데에도 또 다른 운이 필요하지만, 그 확률이 0은 아닙니다.
그 좁은 기회의 창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달라져야 합니다. 마인드셋을 직접 수정하려 들지 마십시오. 자질과 환경의 누적이라 의지 단독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환경의 피드백 구조 자체를 바꾸세요.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갈래로 갈립니다. 자리를 옮기는 일과 자리를 친절하게 만들 도구를 짜는 일입니다.
① 자리를 옮긴다
어떤 영역이 본인에게 친절한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코딩이 즉각적인 컴파일 에러와 테스트 통과 신호가 주어지는 친절한 환경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악한 환경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인드셋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자기 기질의 결에 맞고 피드백이 짧고 정확한 영역을 찾아두는 일입니다. 이건 의지가 아니라 탐색의 문제이고, 탐색은 기질이 다소 약해도 시간을 들이면 가능합니다. 20대를 다 들여서라도 자기 기질이 맞는 영역을 찾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합리적인 투자입니다.
옮겨야 할 반대편도 명확해야 합니다. 사회는 사악한 영역에 오래 머무는 것을 끈기라 부르지만, 사악한 영역의 누적 경험은 학습된 무기력의 연료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리는 신호가 두 층에 걸쳐 있습니다.
환경 쪽 신호, 이 자리가 사악한가:
- 같은 노력을 반복해도 결과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인과가 끊겨 있다는 직접 신호입니다.
- 3년이 지났는데도 자기 동작 중 어느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지 분간이 안 된다. 피드백이 학습으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 그 영역에서 잘하는 사람의 비결을 물어도 답이 매번 다르고 재현 불가능하다. 사악한 환경에서는 성공조차 우연이라는 신호입니다.
마음 쪽 신호, 이 자리가 나를 깎고 있는가:
- 그 영역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솟아오르는 감정이 자책이다. 마음의 토양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환경 쪽 셋 중 둘이 보이거나, 마음 쪽 하나가 분명히 들려오면, 본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의 피드백 구조가 사악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떠나는 것이 처방입니다. 떠나는 일은 마음을 바꾸는 일보다 사실 어렵습니다. 매몰비용의 무게와 주변의 시선 때문이지요. 그러나 매몰비용은 마음의 토양을 갉아먹는 데 복리로 작용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마음이 망가지고, 마음이 망가지면 다른 자리로 옮길 기력까지 사라집니다.
② 도구로 친절한 자리를 만든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떠날 수 없는 사악한 영역에서 일한다면, 예를 들어 글쓰기와 전략적 판단, 창작과 연구처럼 본질적으로 피드백 주기가 길고 잡음이 많은 일을 한다면, 직접 환경을 친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일기와 복기로 지연된 피드백을 압축하기
- 좋은 코치와 동료 리뷰로 왜곡된 신호를 정정하기
- 측정과 검증 절차로 즉각적인 피드백을 합성하기
- 작은 단위로 잘라 짧은 사이클을 만들기
이건 마인드셋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환경의 피드백 구조를 기술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설계가 누적되면, 같은 영역의 친절함이 몇 단계 올라갑니다.
저도 글 한 편을 쓸 때마다 어떤 문장이 멈춤을 만들었고 어떤 문장이 흘려졌는지, 발행 사흘 뒤 다시 펼쳐 보는 노트 한 권을 쌓아 두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어느 단위에서는 친절합니다. 소리 내 읽었을 때 걸리는 문장은 즉시 보이지요. 다만 독자에게 닿는 결은 사악합니다. 발행한 뒤 며칠이 지나야 어떤 문장이 통했는지 짐작이 가능하고, 그 짐작조차 잡음 사이에서 건져 올려야 하니까요. 그 노트 한 권이 자질이 아닌 도구의 자리에서 글쓰기의 친절도를 몇 단계 끌어올렸다고 느낍니다. 제가 본 가장 효과적인 학습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노트 한 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질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영역의 사악함을 도구로 깎아낸 사람들인 것이지요.
마음먹기보다 자리 옮기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VUCA 시대에 평생 학습자가 살아남는다는 명제는 옳습니다. 하지만 성장 마인드셋을 가져라는 처방은 위태롭습니다. 마인드셋을 직접 바꾸려 들기보다 환경을 고치는 일에 자신의 노력을 모으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개인의 노력이 향해야 할 곳은 의지, 끈기, 낙관 같은 자기 마음의 내부 변수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피드백 구조입니다. 마음을 고치려 들지 말고 자리를 옮기십시오.
물론 자리를 옮기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떠나는 결심에도 시간과 용기가 들고, 도구를 짜는 데에도 그 도구를 만들 만큼의 메타인지가 필요합니다. 자기계발 책의 “마음먹기 나름이다"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문장은 사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먹지 못한 책임까지 떠넘기지만, 그 사람의 비관은 인지 왜곡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추론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이 글이 드리는 가장 작은 약속은 그래서 마음을 고치라는 권유보다 자리에 손대보라는 권유가, 같은 처방이지만 한 칸 더 정직하다는 정도입니다.
마지막은 카스 경영대학원의 로라 엠프슨이 불안한 과잉성취자(insecure overachiever)들에게 남긴 권유로 갈음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잡는 일이 아니라 자리에 손대는 일에 관한 가장 단단한 한 줄이라 봅니다.
당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붙들고 있지 마라.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실패했다는 신호가 아니라 지각있고 감정적으로 성숙했다는 신호다.8
출처
U.S. Army War College (1987). VUCA 어휘는 전략 리더십 커리큘럼에서 도입되어 1990년대 후반부터 비즈니스 문헌으로 광범위하게 차용됨. ↩︎
Zhou Q, Liao W, Allegrini AG, et al. (2026). Non-cognitive skills mediate education-related polygenic score associations with academic achievement across development. Nature Communications. DOI 10.1038/s41467-026-72838-2. 본 블로그 다이제스트. ↩︎
Hogarth RM, Lejarraga T, Soyer E. (2015). The Two Settings of Kind and Wicked Learning Environments.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24(5), 379–385. 본 블로그 다이제스트. 본문에서는 친절과 사악을 표로 양극화하여 정리했지만, 원전은 두 환경 사이의 연속적 스펙트럼을 강조한다. 같은 영역 안에서도 어느 단위, 어느 신호를 보느냐에 따라 친절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
Alloy LB, Abramson LY. (1979). Judgment of contingency in depressed and nondepressed students: Sadder but wiser?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08(4), 441–485. 이 가설은 이후 메타분석(예: Moore & Fresco, 2012)에서 효과 크기가 작거나 맥락 의존적이라는 후속 결과가 쌓였다. 다만 낙관과 통제감이 적응적 환상일 가능성 자체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의되는 자리에 있다. ↩︎
Rotter JB. (1966). Generalized expectancies for internal versus external control of reinforcement. Psychological Monographs 80(1), 1–28. ↩︎
Maier SF, Seligman MEP. (1976). Learned helplessness: Theory and evidence.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05(1), 3–46. ↩︎
Yeager DS, Dweck CS. (2020). What Can Be Learned From Growth Mindset Controversies? American Psychologist 75(9), 1269–1284. ↩︎
Empson L. (2017). Leading Professionals: Power, Politics, and Prima Donnas. Oxford University Press. 카스 경영대학원(City, University of London; 현 베이즈 경영대학원)의 엠프슨 교수가 전문직 서비스 회사의 불안한 과잉성취자(insecure overachiever) 현상을 다룬 책으로, 본 인용은 그가 이 집단에 반복적으로 건넨 권유의 요지를 옮긴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