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1. 미국 선크림 브랜드 Vacation은 제품보다 세계관을 먼저 만들었다. 창업자 3인은 2년간 ‘1980년대 해변’이라는 컨셉만 연구한 뒤에야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2. 휘핑크림 선크림, 사무실용 선크림, 단종된 프랑스 선크림 복원 등 제품의 물리적 형태 자체를 세계관의 일부로 설계하여 자연 발생적 입소문을 만들었다.
  3. 택배 송장(절판된 도트매트릭스 프린터 20대 구매), 가짜 직책(4,500개), 향수 라인까지 고객 접점 전체를 세계관으로 채워 30만 명의 ‘가짜 직원’이라는 팬 공동체를 형성했다.

선크림은 왜 재미가 없었는가

롱블랙의 이 노트는 2021년 미국에서 출발한 선크림 브랜드 베케이션(Vacation)을 다룬다. 런칭 3년 만인 2024년 연 매출 4,000만 달러(약 590억원)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매출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다.

베케이션이 내건 포지셔닝은 “leisure-enhancing sunscreen” ~~ 기능성 제품이 아닌, 여가를 더 즐기게 하는 선크림이다. 이들의 전략은 세계관 구축이라는 한 줄로 요약된다.

이미지 우선 창업: 컨셉이 제품보다 먼저

공동창업자 라크 홀(Lach Hall)과 다코타 그린(Dakota Green)은 뉴욕 광고업계 출신이다. 2017년 멕시코 해변에서 “선크림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조사 끝에 1990년대 이전까지 선크림은 원래 ‘재미’가 돋보이는 카테고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후 2년간 제품 개발이 아닌 무드보드 제작에만 집중했다. 옛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한 해변 사진을 모으며 ‘1980년대 휴양지 세계관’을 완성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풀스위트: 기존 세계관에 합류하다

세계관 연구 중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이 풀스위트(Poolsuite)다. 2014년에 만들어진 1980년대 감성의 인터넷 라디오로, 도트식 화면에 옛 해변 풍경 영상이 흘러나온다. 연 100만 명이 방문하는 사이트였다.

운영자 마티 벨(Marty Bell)에게 “당신의 다음 일은 1980년대의 선크림"이라고 제안했고, 마티가 합류하면서 3인 창업팀이 완성됐다. 마티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만났을 때 둘 다 하와이안 셔츠에 금색 카시오 시계를 차고 있었다. 우린 1980년대를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세계관을 직접 만드는 대신, 이미 구현된 세계관에 합류하는 전략이었다.

42쪽 세계관 피칭

2020년 엔젤 투자 유치 자리에서 이들은 1장짜리 제안서 대신 42쪽 서류를 내밀었다. 1980년대 해변, 풀파티, 태닝족 이미지로 채웠고, 마지막에는 “팩스를 보내고 수표를 가져오라"고 적었다.

투자자 로스 마틴(Rothy’s 공동창업자)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매혹적이었다"고 평했다. 이후 메이지 윌리엄스(왕좌의 게임 배우), AG1 CEO 캣 콜 등이 투자에 참여했다.

제품 형태 자체가 마케팅이 되는 설계

휘핑크림 선크림

2022년 출시한 ‘클래식 휩’(Classic Whip)은 휘핑크림 패키지에 선크림을 담았다. 선크림 매대에 놓인 휘핑크림 용기는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었고, 인플루언서 메러디스 덕스버리의 리뷰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넘겼다.

사무실용 선크림

2023년 출시한 ‘슈퍼 스프릿츠’(Super Spritz)는 방향제처럼 보이는 미스트형 선크림이다. ‘업무용 선크림(Sunscreen for Business)‘이라는 세계관을 별도로 만들어 독자적인 서브 브랜드로 풀어냈다.

아트 디렉터 프리먼은 이를 “브랜드 안에 또 다른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라 설명한다. 신제품에 로고를 붙이고 ‘새로운 베케이션 제품’이라 부르는 대신, 세계관 안에서 고유한 자리를 잡도록 설계한다.

접점 전체를 세계관으로 채우다

감각 설계

  • 청각: 제품 뒷면 QR코드를 스캔하면 풀스위트 라디오로 연결된다. 홈페이지에서는 바닷바람, 새 소리를 조합해 자기만의 사운드를 만들 수 있다.
  • 후각: 조향사와 협업해 코코넛, 피냐콜라다는 물론 ‘젖은 비닐 냄새’처럼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향도 만들었다. 향수 라인도 별도 출시했다.
  • 촉각: 절판된 1980년대 도트매트릭스 프린터 20대를 구매하여 택배 송장을 인쇄한다.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토너 카트리지도 비축했다. 소음이 너무 심해 유리 케이스까지 제작했다.

고객을 세계관의 주민으로

홈페이지 가입 시 ‘모히토 민트 품질 보증 담당자’, ‘어린이 수영장 소음 관리 감독관’ 같은 4,500개 가짜 직책 중 하나를 무작위로 부여한다. 이 직책은 링크드인 프로필에도 설정할 수 있다. 30만 명 이상의 ‘가짜 직원’이 생겼다. 창업자 자신들도 ‘1986년부터 근무 중’으로 설정하여 브랜드와 자아의 경계를 지웠다.

진정성 기반 틈새 공략

“모든 사람과 절친이 되려고 애쓰면서 온갖 움직임에 편승하는 브랜드를 싫어합니다. 모든 브랜드가 모든 사람의 절친일 필요는 없잖아요?”

~~ 마티 벨, 2026년 SXSW

소비자 조사 ~~ 메시지 설계 ~~ 브랜드 구축이라는 통상적 순서를 뒤집었다. 창업자 자신의 취향을 먼저 붙잡고, 그 취향을 좋아할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다.

과거의 복원: 오렌지 젤리 프로젝트

1926년 프랑스 헤어스타일리스트 앙투안이 만든 선크림 ‘오렌지 젤리’는 1980년대 셀럽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으나, 2019년 생산이 중단됐다. 충성 고객은 약국에서 10달러이던 제품에 최대 200달러까지 내며 재고를 찾았고, 1만 명이 재출시 서명 운동을 했다.

2024년 3월 베케이션이 이를 복원했다. 원조의 질감과 향은 유지하면서 차단 효과를 강화했다. 1만 6천 명의 대기자가 몰렸고 출시 3일 만에 품절됐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

이 사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계관의 ‘깊이’가 만드는 신뢰다. 택배 송장 하나를 위해 절판된 프린터 20대를 사고 단종된 토너를 비축하는 행위는, 합리적 비용 계산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바로 그 비합리성이 “이 사람들은 진짜"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계관이 마케팅 전술이 아니라 정체성의 발현이 되는 순간, 진정성이 따라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절친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마티 벨의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브랜드가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타겟을 좁히는 것은 두렵고, 좁힌 뒤에도 그 틈새를 채울 만큼의 디테일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기 때문이다. 베케이션은 ‘좁히기’와 ‘채우기’를 동시에 해낸 사례다.

출처

롱블랙 | 2026년 4월 게재 원문: https://longblack.co/note/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