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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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xn2xt_가 ‘비극의 역설(Paradox of tragedy)’을 언급했다. 고통받는 허구 속 인물을 보며 슬퍼하면서도 그 경험을 아름답다고 여겨 다시 찾는 현상이다. 이에@not_nin_gen이 한국미학회 학술지 『미학(美學)』에 실린 논문 세 편을 추천했다. - 구교선(2023)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능력의 발휘’ 개념으로 비극 고유의 즐거움을 재구성했고, 최근홍(2018)은 쾌의 원천 대신 작품을 찾는 행위 동기와 진입 기준을 분석했으며, 조선우(2020)는 가장 생리적인 회피 감정인 역겨움의 미학적 지위를 검토했다.
- 세 연구를 함께 읽으면 예술 감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이 쾌로 바뀐다는 전통적 설명에서 시작해, 고전 비극부터 대중 호러와 통속 드라마, 불쾌함이 끝까지 유지되는 현대 미술까지 설명 대상이 확장된다.
왜 우리는 일부러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찾아가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슬픔이나 공포, 연민, 역겨움처럼 고통스럽고 불쾌한 감정을 겪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영화관이나 극장, 서점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등장인물이 파멸하거나 괴물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돈을 내고 찾아가 본다. 눈물을 흘리고, 그 고통스러운 감상이 훌륭했다고 평가하며, 비슷한 작품을 다시 찾는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57년 에세이 「비극에 대하여(Of Tragedy)」에서 이를 ‘독특한 현상(singular phenomenon)’이라 불렀다. 현대 미학은 이 문제를 ‘비극의 역설(the paradox of tragedy)’ 또는 ‘고통스러운 예술의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다룬다.1
X 사용자 @not_nin_gen은 이 주제를 다룬 국내 미학 논문 세 편을 소개했다. 세 편 모두 한국미학회 학술지 『미학』에 실린 오픈액세스 논문으로, 각기 다른 시대와 감정을 다루며 서로의 쟁점을 보완한다.
| 저자 (연도) | 논문 제목 | 다루는 핵심 질문 | 주요 결론 |
|---|---|---|---|
| 구교선 (2023) | 비극의 역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 흄의 “비극에 대하여”를 참조하여 | 아리스토텔레스라면 공포와 연민에서 어떻게 즐거움이 나온다고 답했을까? |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영혼 능력이 방해 없이 온전히 발휘되게 하며, 관객은 그 능력의 활동을 지각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다. |
| 최근홍 (2018) | 독특한 현상으로서 비극의 역설: 인과적 접근과 동기 접근 | 고통스러운 예술이 어떻게 쾌를 낳는가보다 왜 우리가 그런 작품을 기꺼이 찾아가는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 고전 비극부터 통속 드라마까지 포괄하려면 행위 동기의 기준을 완화해야 하며, 현실보다 덜 해롭다는 타산적 기준과 장르 관행을 따라가는 미적 기준이면 충분하다. |
| 조선우 (2020) | 역겨움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코스마이어의 ‘미적 역겨움’에 대한 로빈슨의 비판을 중심으로 | 가장 생리적인 회피 반응을 부르는 역겨움은 긍정적 감정으로 전환되어야만 예술에서 가치를 지니는가? | 역겨움 자체가 즐거움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늘날 예술의 가치는 쾌에 한정되지 않으므로 역겨움은 불쾌한 그대로 예술적 통찰과 사회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답하는 비극 고유의 즐거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Poetics)』에서 비극 고유의 즐거움을 “모방을 통해 연민과 공포로부터 나오는 즐거움”(1453b12)이라고 규정했다. 문제는 연민과 공포가 『수사학』의 정의상 분명한 고통이라는 점이다.2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어떻게 즐거움이 나오는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해명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구교선(2023)은 흄이 「비극에 대하여」에서 검토한 세 가지 가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조해 하나씩 기각한 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즐거움 이론에서 새로운 해답을 도출한다.
먼저 흄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세 가지 설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어디서 어긋나는지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흄이 검토한 가설 | 연결되는 아리스토텔레스 해석 | 구교선(2023)이 지적하는 한계 |
|---|---|---|
| 무기력 회피설 (뒤보): 아무 정념도 없는 지루한 평정 상태보다 고통이라도 겪는 변화가 더 즐겁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14장의 변화 선호 언급, 『정치학』 8권 7장의 음악(무시케)을 통한 카타르시스 | 평정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강렬한 즐거움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정을 고통으로 바꾼다고 그 괴로움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정치학』의 카타르시스는 아울로스 연주 같은 멜로디에서 오지만,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의 즐거움은 멜로디가 아닌 플롯에서 온다. |
| 허구 안도감설 (퐁트네): 무대 위 사건이 허구라는 자각이 고통을 완화해 ‘유쾌한 슬픔’을 만든다. | 카타르시스의 의학적 해석: 과잉된 연민과 공포를 동종요법처럼 배출해 치료함으로써 안도와 즐거움을 얻는다. | 의학적 해석은 평범한 비극 관객이 이미 감정이 과잉된 환자라고 전제한다. 또한 『영혼론』과 『수사학』에 비추어 보면 허구 인식이 ‘도망치라’는 내적 명령의 고통은 덜어주지만, 공포와 연민 자체를 즐거움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
| 수사적 기교설 (흄 본인): 사건을 배열하고 묘사하는 작가의 빼어난 솜씨가 부정적 정념을 쾌로 전환한다. | 모방의 인지주의적 해석: 『시학』 4장(1448b)이 말하듯 정교한 모방물을 보며 “이 자가 저 자구나” 하고 추론해 배우는 인지적 즐거움이다. | 내용 파악에서 오는 인지적 즐거움은 희극과 서사시를 포함한 모방물 일반의 발생 원인이지 비극 고유의 즐거움이 아니다. 비극 고유의 즐거움은 사건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다르며, 반드시 ‘연민과 공포로부터’ 나와야 한다. |

세 가설을 기각한 뒤 이 논문이 주목하는 대목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의 규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 결핍을 채우는 과정(생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에게 즐거움은 “자연적 성향(영혼 능력)의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발휘”다(1153a10-15). 어떤 감각이나 영혼 능력이든 그 능력이 좋은 상태에서 ‘최선의 대상’과 관계할 때 방해 없이 완전하게 발휘되며, 그 활동에서 즐거움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떻게 연민과 공포를 경험하는 영혼 능력의 ‘최선의 대상’이 되는가. 해답은 비극 플롯이 지닌 두 가지 특성에 있다.
첫째는 인과적 완결성(통일성)이다. 실제 일상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인과적 연결 없이 혼재해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같은 모범적 플롯은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분량 내에 필연적이거나 개연적인 인과관계로만 완결되어 있다. 관객의 이해를 방해하는 불필요한 우연이 없으므로 관객은 인과 과정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다.
둘째는 예기치 않은 급작스러움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때는 눈앞의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이다. 훌륭한 비극의 주인공은 관객과 도덕적 수준이 비슷한 ‘도덕적 중간자’다. 불행의 계기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 친근자들끼리 벌이는 행동이다. 여기에 사태가 정반대로 반전되는 급전(페리페테이아)과 운명을 깨닫는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이 더해져, 주인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행에 처한다. 주인공은 관객보다 특별히 악하지 않은데도 필연적 인과에 따라 파멸한다. 이 모습을 보며 관객은 주인공의 불행을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고 ‘내 삶의 통제 불가능성’을 실감한다. 그 덕분에 공포와 연민을 느끼는 능력이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울 만큼 최대로 발휘된다.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중요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구교선은 각 반론에 이렇게 답한다.
| 예상 반론 | 구교선(2023)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방어 |
|---|---|
| 반론 1: 일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도 슬픔을 느끼는 영혼 능력이 격렬하게 발휘되는데, 왜 그때는 즐거움이 없는가? | ① 활동에 대한 지각과 집중: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면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임영웅의 노래에 주의를 기울이면 시각 활동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듯, 실제 참사에서는 슬픔, 두려움, 분노가 한꺼번에 일고 장례 절차 같은 현실 문제까지 겹쳐 특정 감정 능력의 활동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무대 위 허구는 관객이 사건 해결에 개입할 필요가 없어 연민과 공포의 활동 자체를 집중해 지각할 수 있다. ② 대상에 대한 평가: 건강한 코로 대변 냄새를 맡는 것은 후각 능력의 최선의 발휘지만 대상에 부정적 평가를 내리므로 괴로움만 느낀다. 내 삶을 파괴하는 실제 불행과 달리 무대 위 허구는 지금 나의 삶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부정적 평가를 내릴 이유가 없다. |
| 반론 2: 내 삶의 통제 불가능성을 깨닫는 ‘자기 앎’에서 오는 인지적 즐거움이 비극의 핵심 아닌가? | 고대 그리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을 이미 알고 극장에 왔으며, 같은 비극을 반복 관람하면서도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움을 느꼈다. 새로운 앎을 얻는 기쁨만으로는 이미 결말을 아는 작품의 재관람이나 공연 내내 지속되는 즐거움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슬픈 기억을 곱씹을 때마다 다시 슬픔이 일듯, 공포와 연민을 경험하는 능력은 인물이 불행에 이르는 과정 내내, 그리고 작품을 다시 볼 때마다 발휘된다. |
따라서 비극을 감상할 때 연민과 공포라는 부정적 감정이 커질수록 즐거움도 함께 커진다. 비극 고유의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영혼 능력이 온전히 발휘되고, 관객이 그 발휘를 지각하는 데서 생겨난다.
쾌의 원천에서 관람 동기로 질문을 바꾸다
구교선(2023)이 고전 비극에서 고통이 극대화될 때 즐거움이 함께 생기는 원리를 해명했다면, 그보다 앞서 발표된 최근홍(2018)의 연구는 호러, 멜로드라마, 슬픈 음악, 이른바 ‘막장 드라마’까지 포괄하는 현대 대중예술 전반을 다룬다. 이 논문이 문제 삼는 것은 기존 미학자들이 비극의 역설을 풀기 위해 던졌던 질문 자체다.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비극이나 호러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쾌를 얻는가(쾌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인과적 물음을 던졌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인과적 접근(the causal approach)이라 부른다.
| 인과적 접근 이론 | 쾌의 원천에 대한 설명 | 최근홍(2018)이 지적하는 한계 |
|---|---|---|
| 전환 이론 (데이비드 흄) | 비극적 과오(하마르티아)와 반전을 묘사하는 유려한 문체와 서사 구조가 ‘아름다움의 정감’을 주며, 이 압도적인 쾌가 부정적 감정을 전반적인 쾌로 전환한다. | 부정적 감정이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쾌로 전환되는지 불분명하다. |
| 메타 반응 이론 (수잔 피건) | 인물의 고통에 연민과 두려움을 느끼는(1차 직접 반응)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내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도덕적 본성을 지닌 사람이구나”라는 도덕적 만족감(2차 메타 반응)을 얻는다.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달리 통속 멜로드라마 〈러브 스토리〉를 보며 우는 관객은 마음이 빤히 조종당함을 알면서도 롤러코스터 같은 ‘값싼 미적 전율’을 즐긴다. 모든 관객에게 도덕적 본성 확인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 |
| 보상 이론 (노엘 캐럴) | 호러의 괴물은 과학적 개념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범주 위반’ 존재여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괴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서사를 따라가며 얻는 ‘인지적 쾌’가 공포와 역겨움의 대가를 압도하는 보상이 된다. |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보러 가는 관객은 한강 둔치의 괴물이 미지의 위협적 존재임을 확인하는 ‘인지적 쾌’만으로 공포와 역겨움을 보상받지 않는다. 장르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층적 메시지나 다른 재미를 기대한다. |
최근홍은 인과적 접근을 두 가지 이유로 비판한다. 예술적 성취가 높은 일부 작품에만 적용될 뿐 대중적인 장르물 전반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왜 기꺼이 그 작품을 찾아가는가라는 역설이 생기는 계기를 놓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홍은 동기 접근(the motivational approach)을 택한다.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가 부정적 감정 경험을 일으키는 작품을 기꺼이 감상하려는 동기는 무엇인가?” 애런 스머츠(Aaron Smuts)가 정식화했듯, 이 역설의 본질은 인간이 고통을 피하고 쾌만 추구한다는 ‘동기 쾌락주의’와 고통스러운 예술을 찾아가는 행위가 충돌하는 데 있다.
쾌를 대체할 관람 동기로 스머츠가 내놓은 답은 풍부한 경험 이론(rich experience theory)이다. 인간에게는 세계와 삶의 가치를 알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 앎은 고통을 직접 겪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주인공 리 챈들러는 자신의 부주의 탓에 일어난 화재로 세 자녀를 잃는다. 형의 장례를 계기로 고향에 돌아와 조카 패트릭, 전처 랜디와 재회하지만, 끝내 상실감과 자책감에서 구원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스머츠에 따르면 관객은 이 치유 불가능한 아픔을 정서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몰입해 체험함으로써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삶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홍은 스머츠의 ‘삶의 가치 증진’과 피건의 ‘도덕적 만족’을 두고, 둘 다 진입 기준(threshold, 문턱)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정한 설명이라고 본다.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작품이 자기 삶의 가치를 높여 줄지 알 수 없다. 가벼운 멜로드라마를 고를 때는 삶의 가치 증진 같은 거창한 목표를 떠올리지도 않는다. 고전 비극 『오이디푸스 왕』부터 대중 호러 〈곡성〉과 〈괴물〉, 멜로드라마 〈8월의 크리스마스〉, 나아가 〈왔다! 장보리〉 같은 이른바 ‘막장 드라마’까지 모두 설명하려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작품을 감상하기로 결정하는 행위 동기(진입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감상한 뒤 개별 작품에서 얻는 가치 보상이다. 그리고 진입 기준은 완화해야 한다.
이 논문이 제시하는 두 가지 완화된 진입 기준을 표로 정리했다.
| 진입 기준 | 해결하는 질문 | 구체적 내용 |
|---|---|---|
| 타산적 문턱 (prudential threshold) | 왜 고통스러운 예술을 회피하지 않는가? (소극적 이유) | 존 모리얼과 마샤 이튼의 ‘통제 이론’에서 착안해 동기 쾌락주의를 완화한다. 예술은 통제된 허구 상황이므로, 현실에서 겪는 부정적 감정보다 나에게 덜 해롭고 감내할 만하다는 인식이 회피를 막는다. |
| 미적 문턱 (aesthetic threshold) | 왜 고통스러운 예술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가? (적극적 이유) | 고차원적 도덕성이나 삶의 통찰까지 기대할 필요는 없다. 해당 작품이 속한 장르의 관행을 이해하고 내러티브 구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최소한의 예술 경험만 기대해도 감상하기로 결정하기에 충분하다. |
관객에게는 이 두 가지 조건만 갖추어져도 고통스러운 작품을 고를 충분한 이유가 생긴다. 감상을 시작한 뒤 실제로 얻게 되는 보상이 〈왔다! 장보리〉 수준의 통속적 재미인지,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수준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인지는 개별 작품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가장 생리적인 감정, 역겨움은 예술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비극의 슬픔이나 호러의 공포보다 훨씬 다루기 까다로운 감정이 역겨움(disgust)이다. 슬픔과 두려움은 고대부터 핵심적인 미적 감정으로 대우받았다. 반면 역겨움은 부패한 사체나 배설물, 오염된 대상에서 촉발되어 헛구역질과 위장의 경련, 즉각적인 회피 반응을 일으킨다. 이 감정은 오랫동안 미학에서 배제되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추한 것(醜) 가운데 역겨움을 일으키는 것만은 결코 아름다움으로 바뀔 수 없다고 선언했다. 예술로 재현해도 실제 대상의 역겨움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곧 ‘투명성’ 때문이다.
조선우(2020)는 역겨움에 관한 두 학자의 논쟁을 정밀하게 대조한다. 캐롤린 코스마이어(Carolyn Korsmeyer)는 1990년대 이후 아브젝트(abject) 미술 등이 주목받으면서 역겨움을 주요 연구 주제로 삼았고, 대표 저서는 『역겨움 향유하기(Savoring Disgust)』다.3 제니퍼 로빈슨(Jenefer Robinson)은 생리학과 심리학의 감정 연구를 근거로 이를 반박했다.
로빈슨은 예술이 일으키는 역겨움의 역설을 설명하는 네 가지 이론을 차례대로 검토하고, 어느 설명이 타당하고 어느 설명이 성립하지 않는지 판정한다.
| 설명 모형 | 핵심 주장과 예술 사례 | 로빈슨과 조선우(2020)의 판정 |
|---|---|---|
| 1. 가중 이론 | (Weighting view / 보상 또는 공존 이론) 역겨움이 불쾌하다는 점은 인정하되, 작품의 다른 긍정적 특질(해방감, 재미, 스펙터클, 자신의 인내심 확인)이 불쾌함을 상쇄한다. 예: 구토하는 장면이 나오는 저급 코미디 영화, 존 워터스의 〈핑크 플라밍고〉(개똥 먹는 장면의 관습 파괴적 재미), 데미안 허스트의 〈A Thousand Years〉(부패하는 소 머리의 스펙터클), 폴 매카시의 〈The Complex Shit〉(거대 배설물 조형물의 창의성) | 성립함 (유일하게 타당한 기본 모형). 역겨움이 불쾌하고 향유하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본성을 왜곡하지 않은 채 작품 감상 경험을 설명한다. |
| 2. ‘즐거운 역겨움’ 이론 | (Pleasurable disgust) 감상을 언제든 중단할 수 있는 통제된 상황이거나 거리를 둔 재현이므로 역겨움 자체가 즐거울 수 있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빌려 쾌를 ‘방해받지 않는 몰두’로 재정의해, 강렬한 역겨움에 몰두한 상태를 곧 즐거운 역겨움으로 본다. | 성립하지 않음. 역겨움은 고유한 신경 경로를 지닌 생물학적 기초 감정이며 오염과 부패에 대한 평가, 복부의 불쾌감을 바탕으로 한다. 통제하더라도 ‘덜 역겨울’ 뿐 ‘즐거운’ 감정이 되지 않는다. 몰두를 쾌로 정의하면 “쾌가 불쾌함을 강화한다”는 어법의 혼란만 초래한다. |
| 3. 통합 이론 | (Integration view) 역겨움이 긍정적 특질과 단순 공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찰이나 재미에 통합되어 기여한다. 예: 루벤스의 〈헤롯 왕의 연회〉에서 세례 요한의 잘린 부패한 머리가 유발하는 헛구역질과 목구멍의 조임이 인간 필멸성에 대한 통찰과 하나로 결합됨 | 가중 이론으로 환원됨. 역겨움이 혼합 감정의 재료가 될 수는 있으나, 그때 우리가 향유하는 지향적 대상은 ‘거대한 배설물 재현이 주는 재미’나 ‘필멸성에 대한 통찰’이다. ‘역겨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역겨움 자체를 음미한다는 코스마이어의 주장은 기각된다. |
| 4. 전환 이론과 미적 범주 ‘지양’ | (止揚, the sublate) 무서움이 무한함에 대한 경외로 바뀌는 ‘숭고(the sublime)’처럼, 역겨움이 신체적 공명을 통해 유기체의 필멸성을 일깨우는 미적 범주 ‘지양’을 이룬다. 이때 역겨움이라는 감정 정체성은 유지되지만 그 유인가(valence, 쾌와 불쾌의 방향)가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어 ‘미적 역겨움’이 된다. | 성립하지 않음. 역겨움 평가의 핵심 주제가 오염과 부패이고 신체 반응이 거북한 이상 유인가는 긍정으로 바뀔 수 없다. 만약 역겨움이 더 이상 불쾌하지 않게 전환된다면, 그 거북함 덕분에 전달되던 필멸성의 통찰이나 매혹도 함께 약화되거나 사라진다. |

로빈슨의 결론은 단호하다. “특별한 미적 유형의 역겨움이라는 것은 없으며, 지양이라는 별도의 미적 범주도 없다.” 예술이 일으키는 역겨움도 일상의 역겨움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복부의 불쾌감을 동반하는 발작적 반응으로 인간의 필멸성을 깨닫는 일은 길에서 시체를 목격했을 때도 일어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그 반응을 정교하게 연출해 관객이 미묘한 진실을 깨닫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작품이 슬픔이나 분노, 두려움을 비롯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방식일 뿐, 역겨움만의 특별한 성질은 아니다.
로빈슨의 비판은 언뜻 역겨움의 미학적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읽히지만, 조선우는 그 의미를 정반대로 평가한다. 별도의 미적 변환 조건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역겨움을 조건 없이 예술의 영역에 포용하는 논변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역겨움의 생물학적, 신체적 측면에만 집중할 때 놓치기 쉬운 사회적, 문화적 통찰도 함께 포착할 수 있게 된다.
| 구분 | 코스마이어의 ‘특별함’ 옹호 | 로빈슨과 조선우(2020)의 비판적 확장 |
|---|---|---|
| 예술의 가치와 역겨움의 적법성 | 18세기 근대 미학의 전제(예술의 가치는 쾌)에 대응하려다 보니, 역겨움의 유인가가 긍정으로 전환된다는 ‘지양’과 ‘미적 역겨움’ 개념으로 역겨움을 특별히 변호한다. | 애런 스머츠의 말처럼 오늘날 예술의 가치는 쾌에 한정되지 않는다. 감상이 끝까지 불쾌하고 거북하더라도 가치 있을 수 있으므로, 역겨움은 불쾌한 그대로 적법한 미적 감정 반응이 된다.4 |
| 역겨움이 전달하는 통찰의 범위 | 복부의 생리적 반응에 집중하여, 유기체의 부패와 신체적 연약함, 인간의 필멸성을 일깨우는 신체적 공명에 주목한다. | 역겨움은 순수성 규범을 유지하는 사회적 ‘문지기 감정’이기도 하다(예: 깨끗이 세탁한 히틀러의 스웨터를 입으라는 요청에 대한 역겨움). 제니 사빌의 왜곡된 나체 여인 회화(〈Plan〉, 〈Hybrid〉)가 유발하는 역겨움은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특정 여체를 오물로 분류하게 길들였는가”(미거, 더글러스)를 성찰하게 한다. |
역겨움에 다른 감정과 구분되는 특별한 미적 범주를 부여하지 않을 때, 역겨움의 예술적 역할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역겨움은 신체의 필멸성에 더해 우리 사회의 구조와 믿음 체계까지 드러낸다.
세 논문을 함께 읽고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룬 구교선(2023)의 해석과 근현대 미술을 다룬 조선우(2020)의 결론을 함께 비교해 보면, 2,400년의 시차를 두고도 한 가지 공통된 통찰이 드러난다.
오랫동안 연구자들은 고통스러운 예술을 정당화하려고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증명하려 애썼다. 고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쾌로 바뀐다는 것(전환), 아니면 더 큰 쾌가 고통을 상쇄한다는 것(보상)이다. 흄의 전환 이론도, 코스마이어가 역겨움을 구제하려고 고안한 ‘지양(유인가의 긍정 전환)’도 모두 “예술 경험의 최종 결과는 쾌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해법이다.
구교선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재구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법은 이 전제를 따르지 않는다. 비극을 볼 때 공포와 연민은 완화되거나 다른 쾌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관객은 완결된 플롯을 보며 ‘내 삶의 통제 불가능성’을 목격하고, 이때 공포와 연민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발휘된다. 그 영혼 능력이 방해 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지각할 때 즐거움도 함께 생긴다. 조선우가 로빈슨을 통해 확인한 현대 미학의 결론 역시 마찬가지다. 루벤스의 잘린 머리 그림이나 제니 사빌의 여체 회화를 볼 때도 역겨움은 끝까지 불쾌하고 거북한 채로 유지된다. 그 거북함이 끝내 가시지 않기에 관객은 인간의 필멸성과 사회적 금기를 절실하게 마주한다. 예술적 기교로 그 불쾌함을 말끔히 지워 버린다면 작품이 던지려던 충격과 질문도 함께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비극과 호러, 불편한 예술을 거듭 찾아가는 이유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일상에서는 현실의 문제와 생존의 부담 때문에 슬픔이나 두려움, 역겨움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예술은 안전한 허구 조건에서 이 감정들을 최대치로 경험하게 하고, 그 감정이 드러내는 삶의 통제 불가능성과 사회적 금기를 성찰하게 해준다. 고통과 거북함이 사라지지 않기에 비로소 가능한 이 선명한 지각과 성찰이 우리가 불편한 예술을 다시 찾는 이유일 것이다.
출처
- 원문 트윗: ㅂㅇㄱ (
@not_nin_gen), 2026-10-20, https://x.com/not_nin_gen/status/2112500378801709534 (인용 원문: 쎕쩨@thxn2xt_, https://x.com/thxn2xt_/status/2112162726915285202) - 구교선 (2023), 「비극의 역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 흄의 “비극에 대하여”를 참조하여」, 『美學(미학)』 제89권 4호, 한국미학회, pp. 1–48. (KCI:
ART003032582) - 최근홍 (2018), 「독특한 현상으로서 비극의 역설: 인과적 접근과 동기 접근」, 『美學(미학)』 제84권 2호, 한국미학회, pp. 265–295. (DOI:
10.52720/MIHAK.84.2.8) - 조선우 (2020), 「역겨움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코스마이어의 ‘미적 역겨움’에 대한 로빈슨의 비판을 중심으로」, 『美學(미학)』 제86권 1호, 한국미학회, pp. 187–220. (DOI:
10.52720/MIHAK.86.1.6) - 치비 서소영 삽화 다섯 장은 「느낌적인 느낌을 숫자로 옮기는 일」의 치비 서소영 라인아트를 참조해 gpt-image-2.5-flare로 따로 생성했다.
트윗 원문에는 ‘쾌락적 역설’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미학과 예술철학 학계의 정식 명칭은 ‘비극의 역설(the paradox of tragedy)’이다. 호러나 멜로드라마까지 포괄할 때는 ‘부정적 예술의 역설(the paradox of negative art)’ 또는 ‘회피의 역설(paradox of aversion)’이라 부른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2권에서 공포를 “파괴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재난이 임박했다고 생각함에 따라 생기는 고통이나 혼란”(1382a21-22)으로, 연민을 “파괴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재난이 그걸 겪어 마땅하지 않은 자에게 닥쳤다고 생각함에서 일어나는 고통”(1386b13-16)으로 정의했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제시한 ‘아브젝트(abject)’는 시체, 배설물, 부패물처럼 고유한 형태와 경계를 상실하여 주체에게 정체성 소멸의 공포와 역겨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가리킨다. ↩︎
조선우는 이렇게 덧붙인다. ‘미적 역겨움’이라는 용어를 유인가 전환이나 특별한 감정 범주라는 함축 없이 쓴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다. ‘미적 슬픔’이나 ‘미적 두려움’처럼 “작품의 속성을 파악하고 감상하는 중요한 구성요소로 작동하는 역겨움”이라는 뜻으로만 쓰는 경우다. ↩︎
